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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사를 바치며, 애쉬마린

  당신께서 임하신 바다가 영원히 저희에게 창성합니다.

  당신 뒤편으로는 오직 지키는 포말만이 무성하오니 당신이시여, 신실한 자들은 마땅히 침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바다, 당신 손끝으로 깃들게 하신 기원마다 순종을 되새겨 이르게 하소서.

  그러나, 당신께서 돌보시거든 세월이 이토록 험준하지 않으리다.

  그리하여 당신이시여, 다시 한번 축복을 온순히 누리게 하소서.

성배 기사단, 비천한 영웅들

  서력 918년, 버림받은 추기경 카시미르 세르주와 레테 티그리스에 의해 교황 시해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대, 제42대 교황 모시스의 즉위는 샤움하펜 역사상 가장 조속하게 치러졌다. 새로운 교황의 등극 직후, 성전 기사단의 구성원 또한 새로이 구성되고 있었다. 오직 여신의 대리자, 교황의 간택으로 임명된 이들에게 감히 도전하지 못할 것이며 고개 들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번 대의 성전 기사단은 시작 순간부터 온전한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다. 그토록 견고한 위명을 내려놓으려 했던 탓인지.

“정말 모르겠더라니까? 그 반쪽짜리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건지. 그래서……”

  모시스의 성전 기사단은 임명 이래, 논쟁 대상으로 무수히 오르내리곤 했다. 성창이 없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밝혀진, 해묵은 진실일 따름이었으되 평민과 외지 출신이 드높은 데 올라설 수 있다는 구상에는 숱한 반발이 뒤따랐다. 그간 억압받았던 계층에서는 숭상하듯 굳건한 지지를 보냈으나, 이들 비천한 자들의 목소리가 공론장에 올라선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듯, 샤움하펜에서 난 자 모두가 말을 얹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누군가는 그릇된 일을 직접 바로잡고자 했다.

“성하께서 모진 일을 겪으셨던 거야.”

  서력 918년 말,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교황 모시스에게 암살 시도가 꾀해졌다. 독살은 다행히 미수로 그쳤으나, 당시에는 큰 행운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후 5년간 모시스가 의식불명 상태에 처했기 때문이다. 교황에게서 간택된 성전 기사단, 성물의 주인 된 권리는 교황에게서 주어진 것이었으니 빈자리가 컸다. 성전 기사단 구성원 대다수의 연령이 어리다는 사실도 크게 작용했다. 구상 도중 빈 채로 남겨진 기사단 결원이 선연했다.

  이때, 부재했던 성창에 대해서도 한 번 다시 주의가 환기되었다. 떠들기 즐거운 양분인 듯이, 사람들은 그들이 성물 두 가지를 완전히 갖추고 있지 않음을 지적했다. 그간 넘보지 못했던 분풀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들 기사단의 정당성을 짚어다 본디 신성과 거룩함이 입혀졌던 자리에 멸칭을 덧씌웠다.

  교황 모시스의 기사단은 ‘성배 기사단’으로 칭해졌다. 이들, 비천한 영웅들이 전락했던 첫 순간이었다.

샤움하펜, 혼란의 5년

  권위가 추락한 자리에는 불손한 마음이 깃들었다.

  서력 919년, 귀족 세력을 주축으로 한 섭정 시도가 행해졌다. 이들은 정당성을 보장할 수 없는 ‘성배 기사단’에게 성국의 내일과 교황의 안위를 내맡길 수 없다는 명분으로 별도의 정부를 내세웠다.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교황 휘하에 속한 자들이었으나 교황의 최측근, 교황이 직접 고른 자들에게 의구심을 제기했으므로 그 속은 낱낱이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새로운 교황 모시스와 정결하지 않게 뒤섞인 새로운 기사단을 축출해내고자 했다. 기사단의 고유한 기능인 의회 권한을 넘보며, 끊임없이 견제했다. 샤움하펜은 분열된 행정으로 사실상 두 덩어리로 나누어졌다.

“그야말로 무도한 시간이 지나갔으니.”

  이들은 오래도록 누려온 기반에 따라 정부에 가까운 권한을 행사했다. 새로운 기사단은 미처 자리 잡기도 전에 들이닥친 상황을 간신히 수습하며 유지하는 게 고작일 따름이었다. 평민과 외지 핏줄로부터의 지지는 흔들리지 않았으나, 이미 거머쥐고 누리던 자들의 기득권이 너무나 강고했다.

  기존의 부조리를 수호하려는 듯이, 이 시기 섭정 세력이 행한 바는 지난 세월을 죄 긁어다 두드러지게 한 것처럼 유난히 잔학하고, 거셌다.

  그럼에도 새로운 기사단은 이들의 명분과 기반을 무너트릴 수 없었고, 무력하게 버티는 시간만이 이어졌다.

  한편, 여신의 노랫소리를 듣는 추기경 두 자리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나머지 추기경, 버림받은 추기경 카시미르 세르주가 죽지 않았음을 뜻하지 않느냐는 추측이 무성했으나 혼란한 정국 속, 사라진 이의 자취란 점차로 잊히기 마련이었다.

악창의 예속, 새로운 공포

  그 가운데 서력 923년, 버림받은 추기경 카시미르 세르주와 레테 티그리스가 5년 만에 돌연 나타났다.

  이들 교황 시해자들은 몸을 숨기는 바 없이 혁명을 선포했다. 이들은 샤움하펜의 병폐를 향해 개혁 의지를 내보였다.

  이들이 조직한 세력은 등장 당시에는 혁명군으로 명명되었다. 핍박받던 자들은 이들에게 기대를 실었다.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기사단과 섭정 세력 간의 대치 사이에서 고통의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저 자들이 저지른 악행을 죽어서도 잊지 않으리다.”

  이들의 힘은 곧장 샤움하펜의 병폐를 응축한 자들에게로 향했다. 섭정 세력이 구축해두었던 기반은 곧 속속들이 혁명군에 의해 도륙되었다. 그야말로 살육이었다. 여지를 두지 않고 자행된 행위는 혁명의 마땅한 절차인 듯이, 억눌려 있던 자들을 환희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성배 기사단’은 이들에 의해 대체될 수도 있었으리라. 버림받은 추기경은 성하로 불릴 권리를 움켜쥐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성물은 살육을 행한 바로 그 순간 이미 악이었다. 처단하고자 규정한 자들에게만 향한 힘이 아니었으므로.

  힘을 다루는 자들은, 힘을 온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이, 가장 무고하고 약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의도하지 않은 바였으나 폐허는 그대로 남았다. 혁명군이 머무른 자리는 무수한 비명과 공포로 얼룩졌다.

  혁명군은 이내 반란군으로 칭해지게 되었다.

  잃어버렸던 성창은 악한 자들의 손에서 ‘악창’으로 거듭났다. 여기까지가 세간이 알려진 바다.

  악인들은 샤움하펜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기사단에 반기를 들려던 귀족 세력도, 핍박받던 자들도, 이 당위 없는 무력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하게 공포에 떨었다.

  반란군은 폐허가 된 학원섬을 근거지로 삼았다. 어디로도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반란군은 최초에는 그들의 힘을 ‘악창’으로 지칭하지 않았으나, 끝내 그들을 가리키는 이름에 포함시켰다. 이미 그들이 행한 결과였으니까.

  ‘악창의 예속’, 현재까지도 샤움하펜 전역을 공포로 물들이고 있는 자들의 이름이었다.

  그 끝에, 923년, 교황 모시스가 비로소 의식을 되찾았다.

다시, 5년

  깨어난 교황에게는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모시스의 지휘하에 ‘성배 기사단’은 혼란한 정국을 안정화하는 데 힘썼다.

  ‘악창의 예속’은 결과적으로, 샤움하펜의 안정에 기여했다. 병폐를 솎아내는 행위는 최초의 실패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새로운 교황과 기사단이 척결해냈어야 할 부담을 줄였다. 섭정 세력의 잔당은 반란군에 의해 거의 정리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더구나, 반란군의 공포가 현 교황에게 부정적이었던 귀족 세력의 협조를 끌어냈다. 그들 역시 생존해야 했으니까. ’악창의 예속‘은 같은 성물, ‘성배 기사단’의 힘을 통해서만 견제될 수 있었다.

서력 928년, 현재

  그리고 서력 928년, 현재.

  정국의 수습은 예상보다 훨씬 이르게 이루어졌다. 고인 바다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바다를 환대로 맞이하려거든 공포에 다물린 입이 더는 없게 해야 했다. 새로운 공포, ‘악창’의 주인들을 처단해야 하리라. 통제되지 않는 당위, 이미 결과로 치러진 악이 짙었다.

  교황 모시스와 ‘성배 기사단’은 ‘악창의 예속‘을 처단할 의무를 종용받고 있다. 또한, 샤움하펜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최초의 당위를 잃은, 악인으로 전락한 이들 반란군은 이제 샤움하펜 자체의 멸망을 원했으므로.

  지난한 시간을 거쳐 새로운 바다가 열리리라. 그러나, 누리는 자는 반절일 것.

  그 거머쥔 바가 누구의 몫으로 돌아갈지, 아직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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